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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김순덕 어린 날 여름밤은 앞뜰 뒤뜰에 반딧불이 반짝반짝 으슥한 숲에서는 부엉이 와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 이웃집 할아버지 메마른 기침소리가 지금은 왜 그리운 것일까
아름다운 절도(竊盜) 김 림 여름도 아직은 머언 봄밤 때 이른 손님이 찾아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마침내 내려앉은 모기 한 마리 숨죽이고 감행하는 생명을 건 흡혈 어찌 탓하랴 새끼를 위하여 죽음도 무릅쓴 저 어미의 아름다운 도벽을
사랑나무 조성민 사랑은 열린 문이다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아도 쑥쑥 자라는 나무 한 몸이 되어 세월은 열매를 맺고 우리들 어깨 위로 노을이 번지면 나무는 커다란 키를 흔들며 출렁이는 서녁빛이 된다.
오늘 하루 / 도종환 한 줌 앞에서도 물 한 방울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자 꼭 한 번씩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도 진흙 속에서도 제대로 살자 수 천 번 수 만 번 맹세 따위 다 버리고 단 한 발작을 사는 것처럼 살자 창호지 흔드는 바람 앞에서 은사시 때리는 눈보라 앞에서 오늘 하루를 사무치..
신부 미당 서정주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꽃과 낙엽 이야기 여울 김준기 꽃이 말했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낙엽이 말했다 사랑의 끝은 머-ㄴ 이별이라고 꽃이 말했었다 사랑한다면 꺾어서 소유하라고 낙엽이 말했다 꽃잎이 마르면 낙엽보다 진한 그리움만 남는다고 꽃이 말했었다 사랑은 영원한 꽃을 피울 것이라고..
줄포에서 이상국 동해(東海)에서 조반을 먹고 줄포(茁浦)에 오니 아직 해가 남았다 나라라는 게 고작 이 정도라면 나도 왕(王)이나 한 번 해볼걸 큰 영(嶺) 하나만 넘어도 안 살아본 세상이 있고 해 질 때 눈물나는 바다가 있는데 나는 너무 동쪽에서만 살았구나 해마다 패독산(敗毒散) 몇 ..
노을처럼 이휴래 석양을 바라며 갯가에 서면 나 저토록 토실한 노을이 되고 싶다 해풍에 살찌우고 파도를 일구다 이젠 아픈 세월까지 보듬은 누이처럼 나도 저렇게 붉게 미소 짓고 싶다 서운해 눈물 그렁이던 마음마저 불어가는 한 줌 바람으로 날리고 하늘 품에 안긴 수줍은 꽃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