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47

비밀 통로

비밀통로 김상필 오늘도 어김없이 나보다 일찍 일어나 초대하지 않은 집으로 찾아와 철조망 붙잡고 슬픈 곡조 몇 마디로 붉은 목청 돋워 메마른 늙은이 감성을 풀어 볼 요령이지만 낸들 네 속마음 모를 리 없다 이거야 장맛비 예고해 주려고 왔다는 네 옹색한 변명 아니라도. 내 엊그제 전주콩나물국밥집에서 가평 잣엿 사다 놓은 것은 어떻게 알았으며, 우리 집 베란다에 여름꽃 만발한 건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속마음 도둑맞았다 섭섭해하질 말고.... 이건 숨겨진 보물처럼 조금은 비밀이라고? 그런데 내가 그리워하는 것만큼 너도 나를 그리워하는 가 보다 내가 따뜻한 위로의 하루가 되듯이 너도 어느 슬픈 응어리가 녹아내린다는 건 이 또한 조물주의 비밀 통로가 아니겠느냐 넹큼 그만 울고 떠나거라

문예 2020.08.02

여름 밤은 씨줄 날줄로 짠다

어름 밤은 씨줄 날줄로 짠다 5시에 동이 튼다. 한번 눈을 뜨면 다시 잠들기 어렵다. 벌써 창살 너머로 새벽 그림자기 어른거리고 어둠을 빨아먹은 검은 밤은 커튼 뒤에서 자취의 꼬리를 내리고 있다. 아직은...... 더 자야 할 시간 옆에 있던 주전자가 재빨리 달려와서 물 한 컵 마시라 한다. 다시 누워 손 전화기의 새로운 뉴스를 찾아본다. 그 속에 내가 있다. 하나 목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뛰어 드디어 꼴인 하였다. 그런데 내가 일등을 했다고 손뼉을 치며 한호하고 난리다 ."이거 이상한 마라톤 대회잖아!" 비슬비슬 달려온 내가 1등이라니.....? 말도 안 돼! 둘 TV에 뉴스가 나온다. 아나운서가 우리나라 최고 권위 있는 국가시험(과거?)에 최고의 점수를 받은 사람..

문예 2020.07.09

신사임당

신사임당(申師任堂) 2009년 6월 23일 발행된 5만 원권에는 신사임당의 초상이 들어있다. 최 고가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함에 있어서 많은 역사적 인물 중에 국민의 존경을 받는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에 신중을 기했다. 5만 원짜리 지폐가 처음 나올 당시 초상 인물 후보로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등 10명 중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선정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초상화가 등재된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사임당 신 씨는 ((음 1504.10.9~ 1551. 5.17)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화가, 작가, 시인이었다.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인 딸 이매창의 어머니다. 신 씨의 당호(堂號)는 사임당(師任堂)이다. 동시대의 여..

문예 2017.08.14

노인이 되어서야

노인이 되어서야 요석 김상필 절름 절름 비슬 걸음 누가 탓하랴 건널목 놔두고 무단 횡단하는 꼬부랑 할멈 왜 건너는지 나는 알겠다 어디가 아픈지 나는 알겠다 어째서 아픈지 나는 알겠다 종아리 살 빠지면 무릎뼈 닳고 험한 삶 추적추적 허리뼈 닳아 여든 넘어 가야할 곳 골병 치료실 길 건너 생명을 내던질 만큼 급하지도 않을 텐데 그곳에 가야 가야 하는 부드러운 소망 하나 나도 아버지 지팡이 찾아봐야겠다

문예 2017.04.18

해찰

해찰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일에 집중을 하지 아니하고 딴짓을 하는 것을 해찰을 피운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생각이 난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다가 길가에서 야바위꾼의 손놀림에 그만 정신이 팔려 해찰을 부리다가 돈 잃고 돌아와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곧 속은 것을 깨닫고 후회하였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우리는 사회생활이 끝날 때까지 크고 작은 해찰을 피우며 살기 마련이다. 그만큼 해찰을 일으키는 요소가 곳곳에 시시각각으로 도사리고 있다. 해찰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인생길이 멀어짐은 당연하다. 또한 수렁에 빠질 수도 있고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청운의 굳은 의지로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도 조그만 틈새와 여유만 있으면 끼어드는 것이 해찰이다. 알게 모르게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잘 가다..

문예 2013.10.30

천륜(天倫)

천륜(天倫) 아버님 전 상서 금년 추석날은 날씨도 좋고 연휴까지 끼어 마음이 여유롭습니다. 추석날 아침 저희 자손들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햇과일과 곡식으로 정성껏 마련한 제수(祭需, 제사에 쓰이는 먹거리)를 올리오니 비록 박주산채(薄酒山菜, 변변찮은 술과 산 나물)지만 흠향(歆饗, 신명께서 제물을 받아 드심)하시옵소서. 차례상을 물리고 온 가족들이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생전에 말씀하신 정과 웃음을 나누며 조상님의 은덕을 기렸으니 천륜(天倫, 자식 된 도리)의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성묘에서 돌아와 지금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아이들은 서양판(?) 트럼프 놀이에 푹 빠져있고 어른들은 살아가는 이야기로 폭소가 터집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글이 눈에 뜨이네요. 2013년 9월 17일 자 동아일보 지..

문예 2013.09.21

달력을 넘기며

초 하루를 맞으며 정월 달의 달력을 넘긴다. 나는 한 장의 달력을 넘길 때마다 아쉬움을 느낀다. 무엇인가 일을 끝내지 못하고 넘기는 듯 한 아쉬움, 지나간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 그래서 그래서인지 지난 달력을 찢어 없애는 것보다 위로 접어 끼워 두기를 나는 좋아한다. 일의 일의 연속성과 결과를 반추할 수 있다는 느낌에서다. 그런데 주어진 시간에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그처럼 많은 걸까? 아니다, 그렇다.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한겨울의 날씨이다. 밤새 내린 눈이 빙판길을 이루고 지상 의 모든 것이 새하얀 눈 속에 갇혀 영하의 기온에 떨고 있긴 해도 찬란한 태양 빛은 양지바른 창문을 뚫고 거실 깊숙이 스며든다. 나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들고 여린 생명을 싹 틔우는 지화초들의 속잎을 어루만..

문예 201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