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茶山草堂)은 이조시대 정약용(丁若鏞) 선생께서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유적지이다. 1963 다산초당을 포함한 유적지 일대가 사적 제107호 지정되었다.
나는 2010년 10월 25일 보물로 지정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의 편지첩인 하피첩(霞帔帖)을 붓으로 옮겨 족자로 만들어 걸어두고 늘 가르침으로 보고 존경하며 생활하고 있다.
하피첩 (霞帔帖)
조선 최고의 천재 지식인 정약용(丁若鏞) 선생을 만나러 가보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이다.
탄생 250주년을 맞아 2 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는 다산의 고향으로 생가와 묘, 사당, 실학박물관, 문학관 등 다산 유적지가 있고 이어서 남한강변을 따라 팔당호를 이루는 강물과 호수는 수채화 같은 풍광을 연출한다. 물속에 갈대숲이 있고, 연꽃단지가 더해져 다산 생태공원은 아름다운 자연공원을 이루고 있다.
다산 정악용 유적지
다산 박물관,기념관 이 있다.
유배생활 18년 중 정치개혁, 사회개혁 등의 연구와 노력을 하였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란 48권 16 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관리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취지로 쓴 저술로 통치의 근거는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그의 사상이 담겨 있다.
경세유표(經世遺表 1817)란 조선사회의 정치적인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 제안서이다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토지제도, 부서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했다.
흠흠신서(欽欽新書 1822)란 법률학에도 해박했던 다산의 실제 일어났던 사례를 바탕으로 판결과 형벌, 규범에 대해 다룬 형법이다. 30권 10 책으로 되어 있다, 흠흠신서는 사건을 합리적이고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의미이다.
생가 : 1925년 홍수로 유실된 것을 1986년에 복원하였다. 당호 여유당(與猶堂)으로 형제들과 같이 살았다,
실학박물관 : 상설전시장 3, 특별전시실 등이 있다.
또 하나의 다산유적지를 찾아 유배지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갑니다
다산선생의 발자취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산의 생가와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와 실제 수많은 책을 집필하고 연구한 유배지인 전남 강진 다산초당을 가봐야 한다.
유배지란 주변환경과 어떠한 불편한 생활 속에서 어떻게 감내하면서 18년이란 젊은 세월을 이겨 냈는지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꿋꿋하게 선비의 정신을 놓지 않고 500여 권의 방대한 잭을 저술하고 후진까지 양성한 초 인간적 능력이 어데서 나왔는지 알고 싶어 유배지의 탐방은 이루어졌다.
그 당시 나라가 처한 운명적 당쟁에 휩싸여, 천주교인이란 명목으로 자기 가문의 몰락까지 당하는 애매한 통한을 겪으면서 유배길에 올라 이를 극복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굽히지 않은 심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어서, 다산초당 답사는 나에게 소홀히 할 수 없는 깊은 첫 번째 대상지가 되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다. 하나는 남쪽의 다산 마을 다산 기념관 쪽에서 오르는 길이요, 둘째는 백련사에서 오르는 길이다. 둘 다 경사가 급하여 만만치 않은 길이나 나는 백련사 길을 택했다. 내려올 때는 좀 더 급한 남측 길로 내려 올 생각에서였다
2023.6.5 아침 백련사 입구에서 오솔길로 난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 숲이 많다.
백련사 동백숲은 화재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고려말 원묘 국사가 1만 평의 부지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을 심어 조성했다 한다.
가다 보니 녹차 밭이 펼쳐 저 있다. 동백나무와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다.
이 길을 다산은 백련사의 초의선사(茶聖) 아암(兒庵) 혜장선사( 학문이 뛰어난 학승)와 교우하면서 오고 간 길이다.
더불어 이들을 통한 다도에 대한 경도로 유배생활의 신산함을 털고 백성을 위한 실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후일 다성(茶聖)으로 일컫는 초의선사를 통해서 수준 높은 차(茶) 문화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덕산 중턱에 위치한 다산초당 가는 길엔 급경사에 데크계단으로 만들었으나 비가 올 때는 미끄러우니 주의하여야 한다.
아찔한 계단길을 굽이굽이 오르내리며 걷는 길이 험준하여 주의하여야 한다. 숲이 우거져 대낮인데도 어둡다.
왼편은 갚은 계곡 낭떠러지이다
산 허리를 휘감아 돌고 돌아가야 한다.
드디어 다산초당 경내 천일각(天一閣)에 도착하였다
다산 선생이 먼 들판과 바다를 바라보고 시름을 달래던 곳에 후에 강진읍에서 세운 정자라 한다.
올라보니 멀리 강진만 바다와 작은 섬이 아득히 보인다.
天漄一閣(하늘 끝 모퉁이))ㅡ 너른 들판과 강진만 바다가 보이고 가운데 섬은 죽도이다
다산 초당 경내에서 유일하게 시야가 트인 장소이다.
다산 동암(茶山東庵) ㅡ 정약용 선생의 거처로 주로 이곳에서 많은 책을 저술했다 한다.
3개 방 중 하나 寶丁山房(보정산방)이라 하였다.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의 친필을 모각(模刻) 한 것이고 다산 동암( 茶山 東菴)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集字) 한 것이라 한다. 당시 추사가 24살 아래였다고 한다.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東菴)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다산 초당(茶山草堂)
이 유적지는 대한민국의 사적지 제107로 1963년 지정된 강진 다산 정약용 유적 또는 강진 정다산 유적이라 부른다
원래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1957년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곳에 10년간 머물렀다
다산초당 옆,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藥泉)
연못 가운게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蓮池釋假山)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하였다.
6 총사가 자리를 정말 독점하다 ㅎ
앞에 보이는 반석은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해설사 (안 종희) 씨로부터 다산초당의 내력과 다산의 업적 그리고 생활상, 남긴 유품 등 역사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10여분 들었다. 아마 이곳에 상주하며 문화재 관리를 하고 있는 듯하여 고맙고 좋았다.
그동안 내가 붓글씨로 다산선생의 시 몇 편을 쓰면서 존경해 왔다고 하니 그 붓글씨를 온라인으로 좀 보내줄 수 있겠냐기에 쾌히 승낙하였다.
원래는 초가였으나 노후화되어 1957년 기와지붕으로 복원하였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주련글씨를 보자
仙嶠浮雲島細(선교부운도세) 신선되어 오름 부질없고 구름사이 작은 섬
高座登蓮業 (고좌등 연업) 높은 곳 올라 불경 공부
瑤臺涵霧星烈 (요대함무성열) 고대광실 안개에 젖고 별은 빛나네
晨齋就水聲 (신재취수성) 새벽 서당 물소리에 취하네
주련 제작 과정을 보면 강진군 도암면 선정리 김영하가 재운씨에게 추사 글씨를 집자해줘 다산 초당 도편수 이수길의 손자 목수 이수만에게 각을 맡겨서 다산초당 현판과 주련의 각을 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하나 추사 글씨의 원본을 찾지 못하고 있고 이 주련 글씨의 필자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다
다산선생이 해배 후 직접 바위에 새긴 글씨
다산 선생 초상
관어재(觀魚齋)
西菴 (서암. 제자들이 기거한 곳)
다산은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였던 유배생활에서 18 제자가 있었다.
처음 1801년 겨울 북풍이 몰아칠 때 강진에 도착하여, 가는 집마다 문전 축객을 한 그를 따뜻하게 맞이한 사람은 동문밖의 주막집 주인이었다. 이 집에서 4년간 있는 동안 제자들이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니 가르치고 배우는데 외로움도 잊었으리라 생각된다.
백련사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보은산방에서 1년, 제자 이청의 집에서 2년을 머문 후, 먼 외가 친척벌인 윤단씨의 집인 다산초당으로 1808년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다산은 18 제자들과 더불어 교육과 학문적 토론, 저술에 필요한 자료의 수집 등을 통해 많은 저술들을 쏟아냈다.
다산이 강진에서 양성한 제자들은 단순히 스승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다산학단"을 이룰 만큼 학문적 성과도 컸다고 분석한다
내려가는 길 또한 급경사다.
거의 마을 가까이에 제자 윤종진의 묘가 있다.
거들떠보지도 않는지 잡초가 우거진 묘지가 황량하다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이 여인
울창한 나무와 숲은 눈물 어린 한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 없다.
자 이제 시대적 배경을 좀 살펴보자
1791년(정조 15년)에 바오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나자, 부모의 제사가 우상 숭배다. 아니고 문화적 관습이다로 다툼하다가 조상 제사 금지하는 천주교에 대해 정치적 박해가 시작된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가 다스리던 나라였으므로 이들의 행동이 나라의 이념에 맞지 않다는 이유이다.
조선시대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써오던 정조가 1800.8.18 승하하고 1800.8.23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으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사학(邪學) 엄금을 명분으로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가톨릭박해. 학살사건)
시파와 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일으켰다
선왕 정조는 총애했던 진보적인 남인을 중용하여 탕평책을 펼쳤다. 이들은 서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천주교인에 가까운 자가 많았다.
조정에선 천주교 신자들 중 이승훈은 유배 후 순교당하고, 다산의 형 정약종은 사형당했으며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는 등 그 외 수많은 신자들을 참형하거나 귀양 보냈다.
이로써 조선사회는 천주교와 서양 학문을 모두 배척함으로써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는 좌절되고 식민지화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한다.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괴 내 종사촌간으로 24세에 진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또 천주교 신자인 권상연과 다산은 외종사촌간이다. 결국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고 전주 풍남문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 거룩한 최초의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성지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유명한 전주 전동성당이다.
정약용의 유배지 다산초당 생활을 보자
요한 정약용은 형 아우구스티노 정약종과 함께 신앙을 버리겠다는 상소를 올려 목숨만은 살았으나 정약종은 배교를 번복한 뒤 신유박해 때 순교를 당한다.
다산 정약용은 28세에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 병조 판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된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에서 4년 동안 머물던 다산은 1805년 겨울 혜장스님의 주선으로 강진읍내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에 거주했고, 1806년 가을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08년 봄에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으로 들어갔다. 1818년 9월까지 10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의 차 사랑은 다산 四景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茶山四景
다조(茶竈) 뜰 앞의 평평한 바윗돌로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찻물을 끓이던 부뚜막
초당 왼편 뒤쪽의 맑은 샘물이 찻물로 쓰던 약천(藥泉)
동백 그늘 드리워진 뜰 오른쪽의 아담한 연못은 다산이 직접 축대를 쌓고 못을 파 물고기를 기르고 꽃나무도 심고 물을 끌어와 폭포도 만들었던 연지석가산(蓮池釋假山)
초당 뒤쪽의 바위 벽에는 그가 해배(解配)될 때 새긴 정석(丁石)이란 글씨가 있다
그럼 그 암흑 같은 외딴 산속에서 고독과 절망적인 나날을 어떻게 견디며 홀로 지냈을까를 생각해 보자
각별하게 지냈던 사람들
아암 혜장선사(1772~1811) ㅡ 백련사 주지, 학문에 해박한 학승, 다산이 각별하게 토론도 하고 지내며 외로움을 달랬다.
초의선사(1786~1866)ㅡ 茶聖이라 불린다. 해남 대흥사에서 사망
추사 김정희(秋史 , 阮堂 金正喜 1786~1856)ㅡ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하자, 화가, 실학자, 성리학자
걸명소(乞茗疏)에 그가 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걸명소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유배생활 중 아암 혜장선사에게 차 (茶)를 보내주길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로, 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잘 표현 돼 있다.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듯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 하오
나그네는 근래 차버러지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먹고 있소
차가운데 묘한 법은 보네주신 육우다경 3편이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노동의 일곱째 잔도 마르게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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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혜장선사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온 지 4년 후인 1805년 백련사의 아암(兒巖) 혜장선사(惠藏禪師 1772~1811)를 찾아와 <주역>과 <역경>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정약용은 혜장선사를 만나자마자 경학에 대한 그의 놀라운 이해와 식견에 찬탄했고, 혜장선사 역시 정약용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한다.
이 같이 혜장선사는 나이가 10살이나 아래이고 유가의 경학자와 불가의 수도승이라는 차이도 있지만 나이와 종교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교류를 통해 속세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적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혜장선사는 어릴 때 대둔사(대흥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30세에 강회의 종장이 되어 1805년 정약용을 만나 깊이 교유하며 주역과 시를 배운다. 1811년 40세로 백련사에서 입적하였다. 정약용은 만사와 제문을 지어 그 넋을 위로하고 탑명을 지어 천재였던 그이 요절을 슬퍼하고 기렸다 한다.
만덕사지(萬德寺志)
정약용은 한국 고대 불교사인 <대동선교고 (大東禪敎考)>와 <만덕사지(萬德寺志)>를 편찬하였는데 혜장과 그의 제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냈다고 한다. 정약용선생은 이때 백련사지를 엮으면서 고려시대의 8 국사와 조선시대의 8 대사를 정립하였다 한다.
만덕사지는 조선후기 유불 상교의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덕사와 대흥사에서 배출된 학승들이 상호 교류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다산이 만덕사(백련사)와 인연을 맺게 됨으로써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불교사상이 상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라 한다.
한편 강진 월출산 아래 백운동원림(白雲洞園林)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비밀의 정원이다. 곁에 넓은 "강진다원"이 있고 깊은 계곡과 죽림이 울창하다. 원래 원주 이 씨 벽사공파 소유로 정원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경승지로 2019.3.11 등재된 곳이다.
1678년 이전 이담로가 조성한 별서로. 이곳은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6대손 이시헌(1803~1860)과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등과 교유하며 많은 시문을 이곳에 남긴 것으로 보아 당시 선비와 문인들이 이곳에서 차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며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결국 이러한 문인과 선비들이 가까이 있어서 마음껏 자질을 펼치고 외로움을 삭이며 한 많은 한평생을 지낼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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