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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담양 소쇄원(瀟灑園)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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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문지는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이다. 소쇄원은  선비정신과 원림문화의 유산을 계승 보전하고 있는 곳이다.

명승 제40호로 지정된 소쇄원은 내원이 그리 넓지는 않으나 수려한 산세와 지형이 죽림으로 둘러싸여 올곧은 선비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고, 조선시대에 조성한 정원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여 문화유산의 보배로 친다.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으로,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 이용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간원림이다.

 

소쇄원은 1983년 7월 20일에 사젹 제304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 2일에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소쇄원 내원의 면적은 불과 1400여 평에 불과 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조경물은 상징적으로나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낸 조선 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소쇄원으로 가는 길은 양 편에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대나무 숲을 지나면 맨 먼저 대봉대(待鳳臺)에 이른다.  주위의 경관을 둘러본 뒤, 위에 올라 더위를 식히며 조용한 명상을 가져본다. 계곡 건너로 광풍각(光風閣) 건물이 보이고 주변엔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

 

대봉대(待鳳臺)는 봉황을 기다리는 누정(樓亭)을 뜻하며 양산보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으며 손님을 처음 맞이했던 정자이다. 

 

 

초가지붕인 대봉대(待鳳臺)  아래 계곡 암반 위로 흐르는 계곡수가 갈수기에 겨운 듯 졸졸 흐르고 있다 

 

바로 위 길을 따른 애양단(愛陽壇)은  소쇄원에 흐르는 계곡 위에 조성한 담장으로 소쇄원 48 영 가운데 있는 양단동오(陽壇冬午)라는 시제를 따서  송시열(宋時烈)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애양단(愛陽壇) -따뜻한부모의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서 김인후 선조의 소쇄원 사십팔영 중 마지막 47, 48 영에 나오는 이 담장은 크게 3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 애양단(愛陽壇), 오곡문 (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庐)가 그것이다.  

 

47 영 애양단의 겨울 낮 맞이 양단동오(陽壇冬午)에 보면 이렇게 읊으셨다.

'애양단 앞 시냇물 아직 얼어 있지만 / 애양단 위의 눈은 모두 녹았네 / 팔 베고 따뜻한 볕 맞이하다 보면 / 한낮 닭울음소리가 타고 갈 가마에 들려오네'

 

소쇄처사양공지려 (瀟灑處士梁公之廬) - 벼슬 없이 초야에 묻혀 사는 양산보(梁山甫)의 조촐한 보금자리 

우암 송시열의 글씨

 

암반을 다섯번 돌아 흘러간다는 오곡문 -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담장 밑으로 계곡물이 흘러 내려가도록 하였다.

애양단 밑으로 흐르는 계곡수가 있고 그 계곡문을 오곡문(五曲門)이라 하였다.

 

 

계곡엔 거의 물이 마르고 유량은 많지 않지만 아래로 끊임없이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 장마 때 폭포수로 쏟아지는 계곡물을 생각하니 그 비경이 연상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 굽이쳐 흘렀기에 저 바위가 달아 수정처럼 저렇게 반들 반들 할까.

 

건너편으로 보이는 광풍각(光風閣)

 

 

광풍각(光風閣)은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정면 3칸 , 측면 3칸 전후퇴의 팔각지붕을 한 조선시대 정자이다.  광풍(光風)은 강풍제월에서 따온 것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집을 의미한다. 정자의 한 가운뎅 온돌방 뒷면에는 90cm 높이의 함실아궁이가 있다. 광풍각이란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다.

 

대봉대에서 바라보이는 광풍각

 

광풍각 아래로 흐르는 계곡수(溪谷水)

 

대봉대에서 잠시 쉬면서 더위를 식혔다. 바람 한 점 없는 이 산장에도 무심한 폭염은 예외 없이 스며들었다. 

 

계곡물에 손을 넣고 잠시 몸을 식혀 본다. 미지근 한 계곡 물도 큰 효험을 발휘하지 못해 미안한 듯 조용히 웃는다. 

물에 적신 수건을 목에 두르고,  목 선풍기로 바람을 돌려도 높은 기온의 한낮 햇빛 아래선 참아내기 힘든 기온이다.

 

 

애양단을 따라가면 제월당(霽月堂)에 이른다

소쇄원 주인인 양산보(梁山甫)가 학문에 몰두했던 공간으로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소쇄원이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의 이름을 소쇄원(瀟灑園)이라 한 것이라고 한다. 외원(外園)은 11만 7,051㎡의 대 정원이다.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된 당시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그 후 1614년 양산보의 손자가 다시 지었다. 제월당과 광풍각 2 동만이 남아 있다.

 

 

 

이곳엔 많은 당시의 학자들이 남긴 글의 현판들이 걸려 있다. 이제 소쇄원의 정수리에 와 앉아 있으니 나의 담양여행의 목적을 거의 푼 셈이다. 일단 걸터앉아 옛 선비의 정취도 맡아보고 올라서서 현판에 새겨진 글들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아야겠다. 이 글씨 중에서도 기대하던 우리 선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할아버지의  소쇄원(瀟灑園) 48 영(詠)을 보니 얼마나 반갑던지. 

 

 나의 16대 선조(先祖)이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할아버지(1510~1560)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서 시호는 문정(文正)이시다. 호남 유일의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 이시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에 모시고 있는 하서 할아버지께서 낙향하시어 선비들과 교류하시던  이 활동무대 현장에서 바라보는 48 영의 글은 나에겐 남다른 감명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하서 할아버지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선비 정신의 사표로, 정조대왕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두루 갖춘  오직 한 분은 하서 김인후 "라 하지 않았던가.

 

 

 

제월당(霽月堂)에 있는 河西 金麟厚 할아버지께서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소쇄원 48 영 시(瀟灑園 48詠 詩) 편액이 1, 2편으로 나누어 걸려 있다.

 

소쇄원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송순(宋純, 1493~1582)  임억령(林億齡, 1496~1568)  , 김윤제(金允悌, 1501~1572)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정철(鄭澈, 1536~1593) 등등.

 

 

 

제월당에서 잠시 쉬었다

 

제월당에서 광풍각으로 내려가는 담장 문 협문이다

 제월당에서 광풍각으로 내려가는 담장 문 협문이다

 

위교 -그 위로 대숲이 무성하다

 

하성흡작, 소쇄원 48 영(詠) 중 2 영 침계문방(枕溪文房) 시냇가의 글방에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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