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오후
1. "이 우산 쓰고 갔다 올래요?"
비를 맛고 난감해 서있는 나를 향해 던지는 어느 여인의 낯선 음성이다. 돌아보니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개인 쇼핑용 커터기를 끌고 우산을 받치고 마트로 들어오던 길이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러나 망설여지는 대답
"고맙습니다만 집이 좀 멀어서.... 소나기이니 그치겠지요."
호의를 무시하지 않고 거절하기도 쉽지 않은 너무도 곱고 아름다운 마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내놓은 말이다.
패키지 우유 2팩을 사들고 마트를 나서는 순간, 내리는 비를 피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나에게 다가온 여성은 쇼핑하러 마트에 들어오던 길이였다. 호의에 대한 나의 진심에 의문이 가는지 그래도 안정이 안된 듯, 내가 뒷걸음질하여 마트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여 서 있는데,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므로 들어가지 않고 곁에서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나 괜찮으니 어서 들어가 일 보세요" 두 번이나 간청하니 드디어 꾸벅 인사하고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마다 다 바쁘고 개인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의 상황에서 남을 위해 마음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이 인정 덤이 넘치는 은혜를 받은 나는, 보기 드문 큰 행복으로 충만되어 비를 맞아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래 그렇게 매마른 사회는 아니야. 그래서 나와 너는 공존하는 거지 . 작은 인정이 이렇게 큰 기쁨일 줄이야.
2. "누구 비 맞을 사람 없어요?"
마트 안에서 우산을 하나 살까 말까 하다가, 비가 소강상태를 보여 집을 향해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중간쯤 오자 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피할 데라곤 없다. 그냥 맞고 가자. 사거리에 도착하여 신호를 기다린다. 이제 비를 적당히 맞은편이다. 그래서 비를 맞으며 푸른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가 바뀌자 10여 명의 인파가 횡단보도의 빗길을 건넌다. 인파에 끼어 나도 건넜다.
나도 모르게 "누구 비 맞을 사람 없소?"하고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마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길을 건너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누군가 뒤에서 "같이 받아요" 하며 우산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받쳐준다.
옆을 보니 역시 젊은 30대 같은 키가 큰 여인인데 우산을 받쳐 든 손목엔 약봉지가 쥐어져 있다.
"아이고 고마워라"하고 그냥 받아들여 바짝 붙여주는 우산을 함께 받았다.
"난 이 비를 조금 맞는 거야 더위보다 낫겠다고 생각하니 맞을 만도 한데" 하고 변명 아닌 변명도 해 보며 그이의 따뜻한 마음씨에 고마움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러나 그 여인의 마음속에는 우산 없이 비맞고 있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측은 해 보였기에?라고 생각하니 무모한 노인네의 고집스런 행동이 타인의 눈에 비치는 것을 생각지 못한 성찰이 후회로 치민다.
길을 건너 자 "집이 어디십니까"하고 묻는다.
난 "이 쪽 아파트 삽니다"
"그럼 같이 가시죠"하며 동행해준다. 난 같은 방향으로 생각했다.
"늙은이가 우유 하나 사러 우산 없이 나섰다가 아주 난감한 처사를 당하는구먼"
"소나기는 갑자기 쏟아지니 어쩔 수 없죠"
대화 몇 마디 중에 아파트 현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우산을 접고 보니, 나는 비를 맞지 않았는데 그이는 온몸이 젖어 있지 않은가.
"저런 안됐네. 이를 어쩌나"
"정말 고맙고, 미안하오"
"괜 찬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잘 가시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길을 보이지 않게 물끄럼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여인이 아니고 단지 밖으로 나가고 있지 아니한가. 자기 갈 길을 숨기고 나를 위해 우회하여 베풀고 돌아가는 그 모습, 분명 천사 아니면 해 낼 수 없는 이 따뜻한 마음씨는 어데서 나오는 것일까?.
순간 나는 이 지극한 사랑을 받고 격한 감정에 한동안 우두커니가 되었다.
그날 나는 어데 사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처음 받는 선(善)의 섬광에 감전되어 긴 여운으로 한 밤을 지냈다.
'내가 언제 이런 복 받는 일을 했었던가?' <같이 받아요> 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