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사시사 (허난설헌 시)

서로도아 2010. 3. 2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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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초희) / 사시사(四時詞)

 

춘(春)


뜨락이 고요한데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목련꽃 핀 언덕에선 꾀꼬리가 우짖는다.

수실 늘인 장막에 찬 기운 스며들고

박산(博山) 향로에선 한 가닥 향 연기 오르누나.

잠에선 깨어난 미인은 다시 화장을 하고

향그런 허리띠엔 원앙이 수 놓였다.

겹발을 걷고 비취 이불을 갠 뒤

시름없이 은쟁(銀箏) 안고 봉황곡을 탄다.

금굴레[金靷] 안장 탄 임은 어디 가셨나요

정다운 앵무새는 창가에서 속삭인다.

풀섶에서 날던 나비는 뜨락으로 사라지더니

난간 밖 아지랑이 낀 꽃밭에서 춤을 춘다.

누구 집 연못가에서 피리소리 구성진가

밝은 달은 아름다운 금술잔에 떠 있는데.

시름 많은 사람만 홀로 잠 못 이루어

새벽에 일어나면 눈물 자욱만 가득하리라.

 

하(夏)

느티나무 그늘은 뜰에 깔리고 꽃그늘은 어두운데

대자리와 평상에 구슬 같은 집이 탁 틔었다.

새하얀 모시적삼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부채를 부치니 비단 장막이 흔들린다.

계단의 석류꽃 피었다가 모두 다 지고

햇발이 추녀에 옮겨져 발 그림자 비꼈네.

대들보의 제비는 한낮이라 새끼 끌고

약초밭 울타리엔 인적 없어 벌이 모였네.

수 놓다가 지쳐 낮잠이 거듭 밀려와

꽃방석에 쓰러져 봉황비녀 떨구었다.

이마 위의 땀방울은 잠을 잔 흔적

꾀꼬리 소리는 강남(江南)꿈을 깨워 일으키네.

남쪽 연못의 벗들은 목란배 타고서

한 아름 연꽃 꺾어 나룻가로 돌아온다.

천천히 노를 저어 채련곡(埰漣曲)부르니

물결 사이로 쌍쌍이 흰 갈매기는 놀라 날으네.

 

추(秋)

비단 장막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고 새벽은 멀었지만

텅 빈 뜨락에 이슬 내려 구슬 병풍은 더욱 차갑다.

못 위의 연꽃은 시들어도 밤까지 향기 여전하고

우물가의 오동잎은 떨어져 그림자 없는 가을.

물시계 소리만 똑딱똑딱 서풍 타고 울리는데

발[簾] 밖에는 서리 내려 밤 벌레만 시끄럽구나.

베틀에 감긴 옷감 가위로 잘라낸 뒤

임 그리는 꿈을 깨니 비단 장막은 허전하다.

먼 길 나그네에게 부치려고 임의 옷을 재단하니

쓸쓸한 등불이 어두운 벽을 밝힐 뿐.

울음을 삼키며 편지 한 장 써 놓았는데

내일 아침 남쪽 동네로 전해 준다네.

옷과 편지 봉하고 뜨락에 나서니

반짝이는 은하수에 새벽별만 밝네.

차디찬 금침에서 뒤척이며 잠 못 이룰 때

지는 달이 정답게 내 방을 엿보네.

 

동(冬)

구리병 물소리 소리에 찬 밤은 기나길고

휘장에 달 비치나 원앙금침이 싸늘하다.

궁궐 까마귀는 두레박 소리에 놀라 흩어지고

동이 터오자 다락 창에 그림자 어리네.

발 앞에 시비(侍婢)가 길어온 금병에 물 쏟으니 

대야의 찬물 껄끄러워도 분내는 향기롭다.

손들어 호호 불며 봄산을 그리는데

새장 앵무새만은 새벽 서리를 싫어하네.

남쪽 내 벗들이 웃으며 서로 말하길

고운 얼굴이 임 생각에 반쯤 여위었을 걸.

숯불 지핀 화로가 생황을 덮일 때

장막 밑에 둔 고아주를 봄술로 바치련다.

난간에 기대어 문득 변방의 임 그리니

말 타고 창 들며 청해(靑海) 물가를 달리겠지.

몰아치는 모래와 눈보라에 가죽옷 닳아졌을 테고

아마도 향그런 안방 생각하는 눈물에 수건 적시리라.

 

 

허난 설헌(許蘭雪軒, 1563∼1589)

명종, 선조 때의 여류 시인으로 이름은 초희. 허균의 누이로 일찍이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여자에게는 이름도 없던 시대에 이름을 가졌고, 여자에게는 글도 가르치지 않았던 시대에 시를 지었던 허난설헌. 허난설헌은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종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나가야 했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결혼 생활의 불만과 친정에 겹친 화로 인해 생긴 고뇌를 시작으로 달래며 조선조 여류 문학을 대표하는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섬세한 필치로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읊어,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

작품'유선시' 등 142 수의 한시와 규원가 등의 가사가 있고 시집으로 (난설헌집)이 전하며, 자신의 소망은 가슴 속에 둔 채 남의 일에 봉사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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