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키진 성터는 소화 47년에 일본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도 됐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어 나키진 촌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그 유적지를 밟아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나 바람이 심하고 일기는 불순하여 먼저 관광의 순서로 들어갔다.
14세기경 오키나와 북부지역은 호쿠잔(北山), 중부지역은 추잔(中山), 남부지역은 난잔(南山)이 각각 지배했던 산잔정랍(三山鼎立)의 시대였다. 호쿠진 왕은 나카진성을 거점으로 오키나와 섬 북부를 지배하며 중국과 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1416년(1422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추잔의 쇼하시(尙巴志)에게 멸망당하여 호쿠진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나키진촌
후쿠진이 패망한 후 추잔은 북부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나키진 구스쿠에 간슈(監守)를 설치. 거처하는 성으로 구스쿠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사쓰마군으로부터 류큐가 침공받으면서 성은 불에 탓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표 후 나키진성터로 가는 길에 옛 가옥이 보인다.
잿빛 고생대 석회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나키진 성터의 성벽은 완만한 성터의 경사면에 겹겹이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성벽의 돌출부는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옆이나 뒤쪽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곳 성터의 성벽은 대부분이 원형 그대로이다.
헤이로몬(平郞門)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어서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정문에 해당하며 현재의문은 1962년 류큐정부 시대에 복원되었다고,
류큐국 유래기에 '호쿠잔 왕자' "정문인 헤이로몬을 수호하다"라고 나온다고.
이 계단은 1960년에 정비된 753 계단의 돌계단이다. 계단이름이 753 계단이다.
나키진 성터의 간히자쿠라
나키진 성터는 벚꽃의 명소로서 알려져 있으며 , 매년 1월부터 2월에 벚꽃 축제가 열린다고. 벚꽃 나무는 1960년대 중빈에 식수하였다 한다.
가자후
가는 강이나 샘물을, 자후는 골짜기를 의미한다. 골짜기에 노출된 자연석이 개성 있는 경관을 연출하다.
우마아를 둘러싸는 형태로 정전(슈카쿠), 북전, 남전의 건물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행사 등에 이용되었던 중요한 광장이다.
우미야에서 남쪽으로 가면 성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우치바로(御內原)이다. \전설에 따르면 우치바로는 궁녀들 방이 있던 곳으로 성내애서 가장 신성한 우타기(御獄)가 있다.
우치바루 북단은 성내에서 시야가 가장 확 트여서 나카진성터 성벽을 거의 다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우미야(大庭)에 있는 시계마 우루다루의 노래비석이다
나키진 선 남쪽에 있는 시계마무라(志慶眞村)라는 부락에 우루 다루라고 하는 미인이 살았다.
아름다운 흑발의 우루다루에 관한 소문은 온 나라에 퍼져 '나키진우나 미(今歸仁御神)라 불렀으며 당대 산호 쿠(山北) 왕도 후궁으로 삼았다.
아무런 불편 없이 행복한 나날을 지냈으나 연로한 왕에게는 오랫동안 후사가 없어 왕비 우루다루(乙榑)도 후사를 갖기만을 가도 하였다.
이윽고 왕비가 임신을 하게 되고 그 임신을 겨울이 아닌 계절에 열린 귤로 비유하여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한 평화로운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성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 있었던 장소.
슈카쿠(主郭)에서는 시지마조카 쿠(支慶眞門廓)가 내려다 보인다.
슈카쿠(主郭)는 발굴조사를 통해 축성 당시에서 부터 폐성될 때까지의 시기 변천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의 성곽이 이러하니 2중으로 된 철벽수비의 요새를 뚫은 자가 있었을까?
왼쪽 밖의 성곽 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깊은 계곡으로 접근이 불가능 약 100m 이상의 고지로 요새임이 틀림없다
류큐왕국 시대 불의 신을 모시던 사당이다. 1665년 까지 파견된 관리들이 이곳에서 불의신을 모셨다고 한다
높이는 2m 전후로 비교적 낮은 돌담이 수백 미터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발굴 조사로 주택의 터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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