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하늘은 슬프다. 예나 지금이나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건만 큰 변화가 없다. 걸어서 통학하던 그 길이 포장만 됐을 뿐 옛길이 새롭지 않고 시간이 정지된 고도 같다.
둘째 박사 회사에서 설계 감리한 동백 대교를 둘째 박사와 같이 건너니 감회가 새롭다.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에서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을 연결하는 금강의 두 번째 대교이다. 나를 위해 동행해 준 두 아들 내외의 후견에 힘을 얻어 3일간의 장도를 엮어보려 한다.
동백 대교
2018년에 완공 개통한 이 교량의 명칭을 두고 양 시와 군의 화(花)가 동백꽃이라 동백꽃으로 정함에 일치하였다 한다.
또한 동백꽃의 꽃말이 '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서, 양 지역이 서로 돕고 사는 좋은 교량이 될 것이라고 한다.
옛 일제 잔재 가옥을 개조한 유명한 한식당 '한일옥'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초원사진관
옛 추억이 남아 있는 초원사진관에서 우리 기념사진도 남겼다
영화 촬영 당시에 사용하던 차량 모형인 듯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호남의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한 항구 도시로 번창하였으나 해방 후 일본인 철수로 명맥만 유지할 뿐 공업화나 농어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하고 항구의 역할도 미급한 상태이다.
군산 하면 채만식(1902~1950)의 '탁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금강 하구마을엔 <채만식 기념 문학관>이 있다.
거친 들판에서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고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게 들꽃이라면
어렵던 시절에 태어나, 가난과 질병에 맞서 싸우면서, 욕심 없이 살다 간 소설 작가 백릉 채만식의 <탁류>는 1930년대 군산의 선창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유언 문 중에서 글 한 편을 보자.
나 가거든
나 가거든 손수레에 들꽃
가득가득 날 덮어 주오
마포 한 필 줄을 매어
들꽃 상여 끌어 주오
이곳 문학관에서 풍겨내는 군산의 옛날 모습을 그려내는 마당이 까닭 모를 향수를 자아낸다.
나라를 잃고 식민지 생활을 한 지 3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자주독립을 한지도 76년이 지나건만 지금도 변하지 않은 금강의 도도한 탁류와 우여곡절을 겪다가 겨우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한 방조제와 군산 서천을 연결하는 군장대교(2013년)와 동백 대교가 고작인 것을 보면 얼마나 낙후된 옛 모습을 간직하려고 노력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시대의 철길과 둑, 기왓장 하나, 철판, 나무 창틀 하나까지도 고스란히 관상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새벽이면 어물을 경매하던 동창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구나. 고향의 옛 거리 그대로인데 인걸이 없어지고 있으니 고향 땅이 슬프고 쓸쓸할 수밖에....
고향의 성산 비석 삼거리
옥봉 삼거리
나의 모교
이제 보니 도시의 2배만큼 넓다
학생수가 점점 줄어 한 반씩 겨우 20명 정도라 하니. 그나마 스쿨버스로 모셔와야 하고.
론 그라운드에 실내체육관,
저 운동장 끝에는 키 큰 미루나무가 무성했고 학교 운동회 땐 그늘막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엔 방공호도 있어서 공습에 대비 훈련도 하곤 했다.
내가 살던 고향의 옛집이 변해 있다. 지금은 그 누구가 살고 있는지 새 번지만 선명하고 옛 마당과 채소밭이 벽돌 주택으로 변하여 자동차가 한 대 서 있을 뿐 풀 한 포기를 볼 수가 없구나.
이 집에서 흐르는 물을 먹고 태어난 우리 두 아들, 어엿한 박사가 되어 지금 여기 같이 이 앞의 풍요로운 들판을 내려다본다.
우리 집 앞 텃논엔 보리가 노랗게 익어 있고 모든 길이 콘크리트로 포장돼 있어서 농촌의 느낌은 어색하나, 언제나 곡식의 생산 고장답게 황금물결 들판은 망망대해로 포근한 만족감을 안겨준다. 특히 이 지역은 보리농사의 특화지역이어서 빈터 없이 이모작으로 심은 보리를 수확 후 다시 흙을 갈아엎고 6월 말 안으로 벼 이앙을 끝내야 하는 가장 바쁜 시기이다.
한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친구의 안부를 귀띔하니 최고령자란 타이틀을 걸고 누워 병자 행세를 하고 있다니 더욱 착잡한 마음 어이 할꼬.
당시엔 농사철이면 흐르는 냇가에 붕어, 메기, 참게, 새우 등도 많았고, 가을엔 온 논바닥에서 우렁을 잡아 지게로 져 왔는데, 지금은 수로가 조그만 콘크리트 관으로 변하고 그나마 지하로 묻어 그 위는 농로를 넓혀 자동차 길을 만들었다.
일본인 간척지의 소농 시절 공출이란 명목으로 농사지은 거 거의 빼앗기며 모질긴 삶을 견뎌내고, 해방 후 비행장에 미군 주둔으로 인하여, 6 25 사변 당시 전투기의 맹폭으로 포탄과 폭발의 전쟁을 경험하며 어렵게 살았던 시졀,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살다 가셨지만 결국 나라를 되찾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오늘날 강국을 이룩한 초석이 되어 국력의 원동력 역할을 하신 분들이시다.
그리고 국가 재건과 교육, 국방, 이 모든 것들이 전쟁으로 희생된 많은 사상자들 다음 연령대에게도 자연 의무와 책임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을 때, 홀연히 농촌을 떠났다가 60년 만에 백발이 되어 되돌아와 보니 옛 초가집은 간 데가 없고 밭고랑 하나 없으니 뒷 밭에 참외 넝쿨이라도 있다면 붙잡고 울부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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