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熙龍(조희룡·1789~1866) : 조선후기의 서화가
〈漢瓦軒題畵雜存(한와헌제화잡존)〉에 쓰인 글이다.
昨日不可. 今日不可,
어제도 할 수 없고 오늘도 할 수 없었습니다.
謹擇開心吉日, 擬爲先生壽供,
삼가 마음이 열리는 날을 가려 선생의 축수(祝壽)를 위해 바칠까 합니다.
一蘭一石, 難於摘星, 慘憺經營,
난 하나 바위 하나 그리기가 별을 따기보다 아렵군요, 참담하게 애를 써 보았지만
從覺索然, 雖未畵, 猶畵耳
허망함을 느낍니다. 비록 아직 그리지는 못했지만 그린 것이나 같습니다.
편지 글이다. 누군가 축수(祝壽)의 그림을 청해왔던 모양이다. 그리기는 해야겠는데 신명이
나지 않는다. 먹 갈아 붓을 끼적거려 보아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안 나온다. 붓하고 종이만
있으면 저절로 글씨가 써지고 그림이 그려지는 줄 아는 사람들은 이 마음을 모른다. 흥이 돋
아 붓끝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 삽시간에 몇 장이고 끝마칠 그림이, 몇날 며칠을 끙끙대도 난
초 하나 바위 하나를 그릴 수가 없다. 오죽 괴로웠으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했을까?
그림 글씨만 그렇겠는가. 글씨도 다를게 없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환하게 열리면, 먹물이 튀
고 붓이 춤춘다. 몇 날 혹은 몇 달을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봇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주체
할 수 없게 된다. 예술과 학문과 인생의 만남이 다르지 않다. 섬광 같은 한순간의 접점을 위
해 우리는 오래 준비하고 또 기다린다. ( 정민 한양대 교수. 고전문학 에서 옮김 )
2013.4.23 書
◈ 우봉 (又峰) 조희룡은
조선 후기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리며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서화가이다. 추사의
문하생으로 1813년 (순조13)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
위장(五衛將)을 지냈고, 1844년(헌종 10)박태성 등 41명의 전기를 수록한 호산외사(壺
山外史)를 편찬했다. 추사체를 잘 썼고 매화를 잘 그렸다. 홍매도(紅梅圖), 강안박주도
(江岸泊舟圖), 수묵산수도(水墨山水圖) 등의 그림과, 석우망연록(石友忘年錄), 조선도
서해제(朝鮮圖書解題) 등의 문헌을 남겼다.
그가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서 1851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오두막집
에 만구음관(萬鷗吟館 만마리의 갈매기가 울부짖는 집)이라는 편액을 걸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지금은 문화탐방 및 체험학습장으로 유적을 복원하고 대파심던 자리에
튤립을 심어 조희룡길도 조성하여 튤립축제까지 열린다고 한다.
조희룡의 홍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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