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예

조희룡(趙熙龍)

서로도아 2013. 4. 2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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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熙龍(조희룡·1789~1866) : 조선후기의 서화가

 

 

〈漢瓦軒題畵雜存(한와헌제화잡존)에 쓰인 글이다.

 

          昨日不可. 今日不可,   

어제도 할 수 없고 오늘도 할 수 없었습니다.

謹擇開心吉日, 擬爲先生壽供,  

삼가 마음이 열리는 날을 가려 선생의 축수(祝壽)를 위해 바칠까 합니다. 

一蘭一石, 難於摘星, 慘憺經營,   

난 하나 바위 하나 그리기가 별을 따기보다 아렵군요, 참담하게 애를 써 보았지만

從覺索然, 雖未畵, 猶畵耳  

허망함을 느낍니다. 비록 아직 그리지는 못했지만 그린 것이나 같습니다.

 

 

편지 글이다. 누군가 축수(祝壽)의 그림을 청해왔던 모양이다. 그리기는 해야겠는데 신명이

나지 않는다. 먹 갈아 붓을 끼적거려 보아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안 나온다. 붓하고 종이만

있으면 저절로 글씨가 써지고 그림이 그려지는 줄 아는 사람들은 이 마음을 모른다. 흥이 돋

아 붓끝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 삽시간에 몇 장이고 끝마칠 그림이, 몇날 며칠을 끙끙대도 난

초 하나 바위 하나를 그릴 수가 없다. 오죽 괴로웠으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했을까? 

그림 글씨만 그렇겠는가. 글씨도 다를게 없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환하게 열리면, 먹물이 튀

고 붓이 춤춘다.  몇 날 혹은 몇 달을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봇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주체

할 수 없게 된다. 예술과 학문과 인생의 만남이 다르지 않다.  섬광 같은 한순간의 접점을 위

해 우리는 오래 준비하고 또 기다린다.  ( 정민  한양대 교수. 고전문학 에서 옮김 )

 

2013.4.23 書

 

 

우봉 (又峰) 조희룡은

조선 후기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리며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서화가이다. 추사의

문하생으로 1813년 (순조13)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위장(五衛將)을 지냈고, 1844년(헌종 10)박태성 등 41명의 전기를 수록한  호산외사(壺

山外史)를 편찬했다. 추사체를 잘 썼고 매화를 잘 그렸다. 홍매도(紅梅圖), 강안박주도

(江岸泊舟圖), 수묵산수도(水墨山水圖) 등의 그림과, 석우망연록(石友忘年錄),  조선도

서해제(朝鮮圖書解題) 등의 문헌을 남겼다. 

그가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서 1851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오두막집

만구음관(萬鷗吟館 만마리의 갈매기가 울부짖는 집)이라는 편액을 걸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지금은 문화탐방 및 체험학습장으로 유적을 복원하고 대파심던 자리에

튤립을 심어 조희룡길도 조성하여 튤립축제까지 열린다고 한다.

 

 

 

                                                                            조희룡의 홍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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