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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강(도나우강)의 잔물결

서로도아 2008. 10. 2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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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강의 잔물결     

                                                                       정리  요석(樂石)   김 상 필   

 

 

2007년 여름방학 기간 동안 나는 딸애 가족들과 더불어 10여 일 간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한 동부 유럽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다뉴브강 하면 나는 까마득한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학예회를 잊을 수가 없다.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초등학교 5학년 때에 교내 학예회가 있었는데 우리 반 학생들은  ‘다뉴브강’이란 노래를 합창을 하였다. 당시에는 이 다뉴브강이 어느 나라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관통하고 있는 다뉴브강

 

                      

           붉은 노을은 달빛을 가리고

         도하 강변에 나부껴 있는 곳

         흐르는 물결 꽃 바다 이루고

         지저귀는 새 여기가 다늅강

         어기여차 배를 저어 달그림자 깨우치며

         은파 연월 일엽편주 둥실 떠나간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가사로 당시에는 마땅히 부를 노래가 없어서 이 곡이 우리 반의 합창곡으로 선정되었다. 이 곡은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1848~1902)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누군가가 우리나라말로 가사를 붙인 노래라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다뉴브강이 흐르고 있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기에 앞서, 이 노래에는 일본으로 유학한 우리나라  학생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어 감회 깊은 여행길이었기에 그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뉴브강의 도도한 물결 위의 야경 

                               

                                                        

때는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린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

  “지난 3일 오후 11시에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떠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그 승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1 정목 73번지 윤수선(30세)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 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다.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140원(2002년 물가지수 환산 33만 원)과 장식품이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하더라〃.라는 기사와

 

“이 정사한 여자 윤심덕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 시대에 지성인으로 자질을 마음껏 부르다 애인 김우진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진 풍운아”라고 소개되었다.

 

이 윤심덕이 바로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란 이바노비치의 곡에, 애인 김우진이 우리말 가사를 붙여 “사의 찬미 (죽엄의 찬미)”란 제목으로 노래를 불러 일본에서 레코드에 취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수라 한다.

 

윤심덕(1897~1926) 은 평양 태생으로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여자고등 보통 하교를 다니다가 경성 여자고등 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강원도에서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동경 음악학교에 무시험 입학을 하였다. 당시 홍난파(1898~1941)와도 동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윤심덕은 동경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후 연극배우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수로, 소프라노 성악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가족도 모두 음악인으로 언니는 소프라노 윤심성, 남동생은 바리톤 윤기성, 여동생은 피아노를 전공한 윤성덕이다.

 

남자 김우진(1897~1926)은 전남 장성 태생으로 19세에 결혼하여 자녀 1남 1여를 두고 있었는데, 일찍이 일본에서 구마모토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와세다대 영문과를 다녔다, 그 후 문학창작활동과 비평가,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1년 7월 김우진이 주관하는 유학생 동우회의 순회 연극 공연 때, 윤심덕은 소프라노 가수로 출연하였고, 1923년 6월 서울 청년회관(YMCA), 경성 공회당 등에서 연주활동과 라디오 방송도 같이 하였다. 

윤심덕은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레코드 가수로 음반 취입을 하였으며 극단 토월회에서 여배우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가 불안정하고 염문에 휩싸이자 서울 종로구 수은동 60번지 (단성사 부근) 오쿠다 사진관 뒷방에 세를 얻어 숨어들어 도피생활을 하였다.

 

1926년 일본 대정 시대의 마지막 해는 암울했다. 사회주의, 염세주의 풍조가 지식인들 사이에 깊숙이 퍼져 들고 있었다. 그해 4월 25일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고, 5월 9일 일본 긴자 마쓰야마 백화점에서는 첫 투신자살자가 발생하였고, 6월 10일에는 우리나라에서 6.10 만세사건이 일어났다.

 

김우진은 6.10 만세사건 하루 전날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와 윤심덕을 만나, 동경으로 먼저 가라 하고 자기는 7월 9일 동경의 하숙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윤심덕은 여동생 윤성덕과 함께 7월 18일 도쿄가 아닌 오사카로 가서 여관에 투숙하게 된다. 김우진은 뒤에 그곳으로 윤심덕을 찾아가 그들의 활동비를 마련하기 위해 레코드에 “사의 찬미(죽엄의 찬미)”를 녹음하게 된다.  찬미란 창가, 음악이란 뜻이다. 일동 축음기 주식회사 NITTO가 녹음을 했는데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곡에 김우진이 가사를 넣고, 여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윤심덕의 노래로 녹음을 하였다. 이때가 1926년 8월 1일이었다.

 

3일 후 김우진과 윤심덕은 자신들을 정리하고 시모노세키항에서 부산행 관부연락선을 탄다. 그리고 바다에 목숨을 버리고 자취를 감춘다. 그 후 그들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들의 정사 뉴스 후 레코드 회사는 돈방석에 앉게 된다. 실화 “사의 찬미”는 1991.9. 영화로 제작되어 상연된 바도 있다.

 

사의 찬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 이더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는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해방 후에는 이 곡을 이런 가사로도 유행하여 우리도 이같이 불렀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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