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락

어느 노인의 좁고 굽은 길

서로도아 2025. 3. 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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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대에 서울시 중구 충무로 영화인 거리를 출입하고 있을 때 어느 영화촬영인의 CEO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60~70년 대까지만 해도 이런 8mm  sekonic 영사기가 시골 동네를 누비며 필름을 돌려주어  영감을 일으키고 신기하게 본 기억이 있다. 일본 제품으로 110V 전력을 사용하여야 하고 8mm 필름이 없어 지금은 별로 사용 불가능 하지만  희귀성 때문에 빈티지 인테리어 소품으로는 좋은 소장품이 될 것이다.    

 

최근 헌장을 정리하다가 책표지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나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학업성적표다. 이사를 다니다 보면 버리는 것이 많아 과거의 웬만한 짐이 되는 것은 다 버렸기에 신상에 관한 명세서가 남아있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이 성적표 한 장이 70년 전의 학창 시절 생활을 떠 올려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매우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현재와 다른 점은 첫째  당시에 공부한 학과 과목들을 알 수 있고. 둘째 한 학년 인원수와 한 반의 인원수이고  셋째 나의 성적과 석차까지 알 수 있어 새삼스럽다. 

 

당시에는 6.25 사변  전쟁으로 인한 휴전 직후라서 학과에 교련과목이 있어 군사 훈련을 하였고, 1학년의 학생수가 460명, 우리 반은 78명으로  6반까지 있었는데 당시에는 고교에 입학시험제도가 있어서 입학 성적에 의해서 1학년 때부터 우열반으로 나누어,  5반과 6반은 대학 진학반으로  편성하여 지도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6반에 배석되어 73번 학생이 되었다. 나의 석차 점수는 전 학년 14/460,  반 6/78이었구나.  30리 통학한 시골 놈 치고는 괜찮은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담임 선생님은  78명에 대한 학사관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의 20명 내외의 반원수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인다. 당시에는 낱낱이 주판으로 계산해서 이러한 성적표를 수기로 작성했어야 하니 그 노고가 실로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2년 8개월의 해병대 제65기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다

 

 

법학공부에 흥취 되어 대학숙에서 주경야독한 끝에  공직생활의 첫발은 여기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역사, 국어, 수학, 법제대의, 경제대의, 헌법, 민법, 형법, 상법과 각종 소송법 등  재미있는 과목이라 줄줄 외웠다.  상공업이 없던 시절 취업의 길은 오직 실력을 쌓아 공개경쟁에 뛰어드는 것뿐이었다.  응시생들의 수준과 경쟁은 매우 높아 치열했다.  대졸자가 약 40%. 고졸 50% 대재나 중퇴자가 약 10% 수준이었다.

 

이러한 자료가 남아 있어서 다행히 되돌아보는 가회가 됐다

 

 

196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받은 표창장

 

1969년 3월1일 영등포세무서 발령을 받고 1969년 2월 22일 5년 11개월의 교정직을 떠나  전주에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하여 근무의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이미 1968년 9월 세무직 시험에 합격하여 수속을 마치고 발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1969년 3월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다. 

 

국가의 시험 시행 계획 및 공고는  신문지상으로 하였는바, 수험번호에 의해 헤아려 보니 당시 1968년도 세무직 수험생이 약 19,000명 정도였음을  알 수 있고 최종 합격자는  957 명이었다. 국세청이 발족되면서 많은 인원을 채용하였지만 당시 실업자가 얼마나 많아 경쟁이 치열했는 지를 증명해 준다. 응시자수가 많아 각도마다 시험을 치렀고 나는 전주에서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치렀다

 

1969년 3월 1일 영등포세무서 발령을 받고 1969년 2월 22일 5년 11개월의 교정직을 떠나  전주에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하여 근무의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1968년 9월 30일 세무직에 최종합격하여 제1근무희망지를 서울로 하고 기다렸던 바, 성적순으로 희망지로 발령했다 하니 내 성적이 좋았던 것 같다. 이어 총무과 정리계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5월 1일 개인세과 재산세계로 발령받아 자리가 정해졌다. 이어 세무행정과 세법교육이 4주간의 합숙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상 복도 많았다.

 

 

 

 

전자계산기가 나오기 전까지 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평생의 반려필수품 주판이다. 초등학교(당시는 보통학교) 시절에 배웠던 주산이  나의 직업에 유효한 교육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 당시 3학년 때 주산 시험이 있었는데 내가 3등을 한 기억이 난다. 그래서 상대(商大)나 상고(商高)를 졸업한 학생이 유리한 직업군이다.

 

세무행정이 숫자 놀음이고 수학과 부기 재무제표검토 등  공부를 개을리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인 데다 1인당  평균 300~500 여 건의 영업세 고지서를 3개월마다 계산근거를 수기하여 발부해야 하는데, 소득세 고지서까지 합하면 실로 그 업무량이 방대하여 밤을 새우거나 휴일을 잊고 일하고도 집으로 가져와 고지서 발부 시기에 늦지 않게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주판은 사무실용, 가정용, 또한 도우미용,  3개를 사용했다. 1970년 후반기에  전자계산기가 나와 큰 도움이 됐고 주판은 퇴역하게 되었다.

 

이후 1990년 대에 컴퓨터의 등장으로 행정기관 최초로 국세청에 보급되어 전 직원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속하고 원활한 납세자 관리를 하게 되어 국세업무의 혁명을 이룬 셈이다.

 

평생(34년 근무)을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근무한 자에게 엄격한 심사를 거쳐 주어지는 훈장이다

나름대로 공무원 생활을 천직으로 여기고 정년퇴직을 하여야 할 시기에 3년 연장근무의 혜택까지 받고 1996.12. 30 명예퇴직으로 34년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을 보람으로 느낀다. 특히 근무기간 서울시내 14개 세무서와 지방국세청을 오가며 근무했으며  서울에서만 근무한 것은  안정된 생활하에서 공직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돼 행운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