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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락 2024. 3. 1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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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교정직에 근무할 당시에 있었던  높은  교도소담장 안 이야기를 한토막 해볼까 한다.

     

    교도소란 국가가 범죄에 대한 형벌을 집행하기 위해  일반 사회와 격리시켜 강제로 수용하는 시설이다. 그러므로 외부와 통제되고 일부 자유가 박탈됨은 물론이다. 그래서 외부에선 그 안의 생활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가려진 교도소 내의 생활에 대해  굉장히 호기심이 많다. 현재 우리나라 교정시설은 구치소와 교도소로 나뉜다. 

     

    과거엔 형무소라 하여 수형자의 파란 옷과 높은 담장만 보여도 외면하고 다녔으나 요즘은 고위관료는 물론 대통령까지도 드나들고 있으니 많이 친숙해졌다.  그만큼 사회생활을 규율하는 법망이 많이 깔려 있고 법망에 걸리기 쉬워진 사회가 되다 보니 수용인원도 늘고 있어 구치소란 시설이 분리되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전에는  한 교도소 내에 미결사와 기결사사가 있어  담장으로 막아  구분하여 엄격히 구분 수용되었다.  기결사는 형이 확정된 사람을 수용하는 감방이고, 미결사는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아니한 사람을 수용하는 감방이다.

     

    그 안은 분노와 눈물, 고통과 우울이 가득한 곳이다. 이들 범죄인의 동태와 심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이 바로 교도관이다. 감방은 이중으로 된 철창 출입문 안에 있으므로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감방 담당자는 사실상 밖에서 잠근 철문 안에 서 근무하게 되어 반 철창생활을 한다라고 일컬어진다.

     

    교도소 내에서는 규율과 인원파악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루에도 여러 번 점검하는데 아침 6시 30분 기상 후 감방 내에 정열하고 앉은 인원을 파악하고   아침식사 후 공장 일과시작 전 각 공장 인원과 감방에 남아 있는 인원을 파악하고. 점심 직전에 인원 파악을 한 다음,  저녁식 후 입실 전과 입실 후에 다시 파악하여 소내 인원이 총체적으로 이상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교도관은 아침조회를 마친 후 즉시 감방검사에 들어간다, 방안의 이상 유무, 유해물질,  철책의 이상 유무, 규율애 위배되는 행위 등을 검사하게 된다.    

     

    미결사 담당자로 근무할 당시  나는 하루에도 여러 사람의 신입자를 받고 또 내보냈다. 구속영장에 의해  미결사에 새로 입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판사의 무죄 판결이나 집행유예 등에 의해 출소하거나 불복을 포기하면 형이 확정되어 기걸사로 보내야 한다.

     

    좁은 방안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다 보니 감방  문을 열면  사람의 땀냄새, 화장실의 변기통에서 나오는 냄새, 음식냄새 등이 절어서 훈기와 함께 역겹게 코를 찌르며 풍긴다. 그래서 입소순위, 연령, 죄질, 죄수, 학력 등을 고려하여 감방에도 약간의 차등과 질서가 있게 된다. 그러나 어쩌다가 다툼도 있고 구타 협박등이 발생하고  자연 환자도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결사에 새로운 입소자가 4월 4일 들어왔다. 죄명은 살인. 나이 22세. 이름 소재철. 하얀 한복을 입고  들어오는 폼이 젊은 귀공자 같다. 물론 살인죄의 무거운 범죄자이므로 독방에 넣어 수용하고 있었다.

     

    1966년 3월 27일  새벽 용화교주 서백일 살해 사건이 전북 김제에서 일어났다. 

    이 충격적인 살인사건으로 지방신문은 물론  모든 국내의 중앙지와 라디오, TV ( 1961년 12월 국영서울테레비전방송국 개국) 까지도 톱 뉴스, 특종으로 나오면서, 기자들은 피살자 용화교주에 대한 행적과 살인자의 범행 동기 등을 취재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기사에 나온 사람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이 자가  매일 국내 신문과 뉴스를 장악하고 있는 뉴스메이커인 장본인  교주 서백일을 살해한 소윤하다.

     

    나는 첫인상에 그가 살인자라 믿기지 않았다.  밝은 인상과  순응하는 언어, 의젓한 외모 등 어디에서도 살인자라고 짚을 만한 데가 없었다. 

     

    이 즈음 사이비교주 서백일의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각 매스컴과 월간지등은 특종으로 대서 특필하며   피살자 서백일과 살해자 소윤하의 기사가 매일  전면에 게재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대학의 종교문제연구소 교수들 까지도 이 사이비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폐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특집기사로 내보내고 있었다. 

     

    이런 이슈가 된 자의 감방을 담당하고 있는 나로서는 관심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소윤하에 대하여 범행 동기와 목적,  심리적 갈등은 없는지  동태를 유심히 가장 가까이서 여러면으로  접근하여 살펴보아야만 했다.

     

    감방에 들어오는 사람치고 심리상태를 들어보면 거의가 자기변명만 늘어 놓고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소윤하의 변명은 내놓질 않는다. 후회가 없다 한다.

     

     

    용화교의 창시자 서백일에 대한 매스컴 기사는 대략 이러했다.

     

    서백일(徐白日 1888?~1966)은 사이비 종교인 용화교 창시자로 본명은 서한춘(徐漢春)이며, 호는 진공(眞空), 현무(玄武)이다. 1947년에 전북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 용화사(龍華寺)라는 절을 지어 본부로 삼고 금품갈취, 횡령, 여신도 성폭행 등을 자행했다.

       

    출생지는 전남 구례라 하나 이는 확실치 않으며 출생 연도도 1893년이란 설도 있다. 

    그는 신도들에게 후천개벽시에 살아남을 곳이 이곳을 중심으로 한 30리 안이라고 설교하여, 경상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수백 세대의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교세가 급성장하여 신도수가 한 때 80만 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서백일은 금품 사취와 부녀자 농락등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여수좌가 500여 명에 달했는데  여수좌라고 부른 이들은 사실상서백일의 첩이었다, 1961년에는 서백일의 검은손에서 벗어난 여신도 두 여인의  고발로 , 1962.2.2 구속되어  간음죄로  1년 6월의 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건강악화로 10개월만 복역 후 형집행정지처분을 받고 가석방되기도 했다. 

     

    그리고 소윤하(蘇潤夏)에 대해선 이렇다 

    소윤하(본명은 소재열) 1944년생 은 1966년 3월 27일 새벽 2시 20분경 용화교주 서백일이  건물 밖에 있는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 나올 때  숨어있다가  칼로 찔러 살해했다.

    그는 교주 서백일이 불교와 비슷한 교리를 내세워서 신도를 위협하고 공갈하며 금품을 갈취하고 여신도 강간을 일삼았기에 더는 참을 수  없어 결행했다는 것이다.  범행 후 그는 즉시 경찰서로  찾아가 자수한 뒤 "자신의 누이와 여동생이 그에게 당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와 같은 범죄를 행하였다"라고 하였다 한다. 

     

    대체로 이에 대하여 매스컴 등에서는 사회의 혼란기를 틈타 사이비 종교단체가 창궐하여 우매한 국민을 상대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러한 교주 침해의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나는 사회의 여론으로 보나 나 자신의 정의감으로 보나  소윤하의 의로운 행위에  대하여  조금치도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이러한 큰 의지를 보인 데 대해 동정이 갔다. 

     

    소윤하의 말에 의하면 부모님과 전가족이 서백일의 용화교에 빠져 전 재산을 바치고  용화교에 들어가  신도가 되었는데 교주의 기만과 위선을  알고부터 불만을 느껴  자기는 짐짓 불교 조계종으로 전향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한다.

    날로 가족들의 삶은 어려워지고  교주 서백일의 악성이 극에 달했고  동생과 누이에 대한 성폭행이 있음을 알게 된 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야밤중에 화장실 뒤에 숨어 있다가 칼빈 대검으로 살해하게 됐다고 한다.

     

    교도소에 있는 구치소인 미결사에 있는 동안 그가 가장 알고자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사회의 여론과 비판이었을 것이다.

    당시엔 감방에 지필묵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접견 (면회)을 통해 어느 정도 자기에 대한 사회평을 알고 있긴 했겠으나, 형량에 영향을 미칠만한 변론을 위해서는 사회의 여론을 잘 알고 대체를 함이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그 당시 나는  그가 변론작성에 참고가 되도록  스크랩해 둔 여러 논평기사를 보여주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 나는 보직의 변경으로 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어 미결사를 떠났으나 그의 행방은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그 후 그는 검찰 구형 15년이었는데 전주지법은  징역 10년을 선고했고. 바로 항소하여 광주고법은 원심을 깨고 징역 5년만 선고하였으며,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소윤하의 상고를 기각하여 고등법원의 징역 5년형이 확정되었다. 

     

    출소 후 그는 1985년부터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 뽑기 운동을 펼쳐 왔다. 한배달민족정기선양위원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고 일본이 전국의 산 허리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진공(眞空)이니 현무(玄武)니 하면서 서백일(徐白日)과 같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종교 지도자가  없는지 우리주변을 잘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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