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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과 굿당
    종교자료 2012. 7. 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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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李晦) 장군과 청량당(淸凉堂) 설화

     

    남한산성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잠정 등재된 국가의 역사적 문화유산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인지  한갓 산책로나 먹을거리 장소로  알고 실상 짧은 역사적 사실 외엔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소홀히 한 것이 부끄럽기 한량없다. 늦게나마 문화적 가치를

    알고 접근하면 훨씬 흥미롭고 마음이 풍성해지지 않을까 여겨, 비로소 우연히 탐지된 남한산성

    성에 얽힌 설화와 굿당과의 관계를 답사자료를 통하여 밝히고  타인의 글도  인용해   보고자

    한다. 

     

    굿당이란 무당(巫堂)이 신을 시고 굿을 하는 당집을 일컷는다. 그런데 산성 외곽 큰골 상류에 

    '큰골굿당'이 있다.  남한산성을 축성한 이회(李晦) 장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는 도당굿의

    당집이다.  당굿이 이 계곡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시절 아니었나 싶다. 미신타파 명

    목으로 도심이시골마을에 존재하던 당집을 없애므로써 숨어 들어온  듯 짐작이 된다. 그래서 

    이곳 당주도 계곡 상류로 들어와 굿청을 갖춘 가 건물을 여러개 짓고,  굿하는 동안만 무속인에

    임대하는 형식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서낭 아래쪽 건물에 장군신을 비롯하여 여러 신령들을 모셨다. 남한산성 수어장대(서장대)에 있

    는 청량사의 신상들을 여기에도 모신 것이다. 남한산성 청량사(淸凉祠)는 산성 축조공사를 맡았

    다가 억울하게 죽은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 그리고 소실의 영령을 모신 사당이다.  임경업 장군,

    최영 장군이  그러한 것처럼 한 많은 죽음의 주인공 이회 장군도 무속 신앙의   신령이 되었으니,

    그는 남한산성 도당굿의 주신이 된 것이다.

     

    조선16대 임금 인조 2년 남한산성을 축성(1624~1626, 2년 4개월)할 때  광주유수   이서(李曙)는

    축성공사를 두 구간으로 나누어, 동 남쪽은 부하인 이회에게 맡기고,  서북쪽은 승(僧)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켰다.

    이회는 그날부터 오로지 성쌓는 일에만 몰두하여   돌 하나 흙 한 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

    다시피 하였다. 장군의 성격이 치밀하고 정직하여 완벽하게 성을 쌓다보니  제날자에 공사를 마

    감하지 못 하였다. 그 과정에서 축성 자금마져 부족하여 자기의 사재(私財)까지  전부 던졌으나,

    준공하기에는 아직도 자금이 부족하여 공사가 늦어지고 있었다.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

    되어서 기일안에 준공 되었을 뿐 아니라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중 남은 금액까지도  반납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회는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모함을 듣게 되었다. 간신들이 장군이 사리사욕

    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 공금을 횡령했다는 상소를 하여 이회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장군은 결백을 호소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관가에서는   이를 사실로 믿어 서장대에서 

    이회를  참수형(斬首刑)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형이 집행되기 전에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신이 죽기는  합니다만, 내가 죽는 순간 죄가 없으면  한 마리 매가 날아 올 것이다"라고 하였

    다.   그러나  비참하게 형이 집해이 되자,  피 흐르는 이회의 목위로 순간 매 한마리가 날아오더

    니 시체 위를 맴돌고 서장대 근처 바위 위에 앉아  매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뒤  조사해 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군데도 정성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회가

    은 성은 매우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관가에서는 서장대 근처에 사당을

    고 '청량당'이라 현판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 하였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매가  앉았다가 발

    자국을 남긴 서장대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 굿당 안에는 청량사와 마찬가지로 이회 장군이 처형 당할 당시에 나타났다는 매와 바위를

    린 탱화가 걸려있다. 가슴아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회 장군은 모자라는 성곽축조 공사비 마련을 위해  부인 송씨와 소실 유씨를  삼남으로 보내

    자금을 구해 오도록 했다. 어렵게 자금을 모은  두 부인은 남한산성으로 오는 길에  송파나루에

    서 남편의 처형 소식을 들었다. 두 부인은 남편의 억울함을 통분해 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싣고 온 쌀섬을 모두 강물에 던져 버리고  자신도 강물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이어 목숨을

    끊었다. 이때부터 이 강을 쌀섬여울이라고 한다.  장군을 모신 굿당에는 송씨 부인과 소실 유씨

    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이회 장군은 지형이 험한 구간의 공사를 철저히 하다보니 공사비가 모자라고 공기를 맞추지 못

    한 것이지 추호도 횡령이나  나태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장군은  저세상 사람, 때가  늦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회 장군이 쌓은 구간의 성벽이 가장 튼튼하고 완벽하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

    음미하며 더불어 남한 산성을 답사한다면 축성된 성곽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이며 역

    적 사실이 내 몸에 밸 것이다.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는 사람들이 무당들이다. 무당들은 원혼을  신격으로 모시고 해원의식을

    한다. 이게 굿이다. 남한산성 도당굿이 여기서 유래한다. 지금의 청량사 앞에는 1920년 일제시

    대까지 늘 무당들이 돌아가며 번을 서는 당집이 있었다는데,   당집이 생길당시에 심었다는 향

    나무만 남아있을 뿐 당집은 흔적도 없다. 향나무의  수령이 350년쯤   된다하니 도당굿의  역사

    이쯤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무당이 주재하는   별신굿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

    듯 전통문화와 향토사적 바탕에  민속신앙이  자리하고 있으며, 천신제,   산신제, 서낭당, 장승,

    솟대, 돌탑 등 신적 존재와 더불어 무속과 굿 등의 무속신앙도    문화유산과 무관하다고  볼 수

    만은 없다 하곘다. 

     

     

     

     

    남측산성

                

     

     

    수어장대(서장대)

     

     

     

     

     

    매바위 탱화

     

     

    청량사

     

     

    큰골굿당 입구

     

     

    장군석

     

     

     

     

     

    신갈나무서낭목과 서낭탑

     

     

    굿청 내부의 신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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