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浮石寺 탐방 |
분당노인종합복지관 서예반 인원15명은 야외교육현장을 찾아 2009년 10월 28일 紹修書院과 浮石寺를 탐방하였다.
영주축협공동판매시설인 대형 식당에서 불고기점심과 함께 몇잔의 술로 이른 아침부터의 여독을 풀어 냈다. 총무가 푸짐하게 준비해온 간식으로 끊임 없이 입막음을 했건만 야외라 그런지 음식맛이 꿀맛이다
사람은 배가 텅 비어서 배가 고픈 것이 아니다. 사실 위는 비어 있어도 비어 있는 줄 모른다. 우리에게 허기라는 감각을 느끼라고 지시하는 놈은 다른 아닌 우리의 뇌인데, 뇌의 시상하부의 바깥쪽에서 이 배고픔을 관장(管掌)한다. 그런데 웃긴 것은 당분(糖分)이라는 것이 이 시상하부의 안쪽과 내연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당분이라는 놈(?)이 우리 뇌에 몰래 들어와 자기 배부르지?라며 요염한 미소로 유혹하면 이 뇌란 놈은 멍청하게도 고개를 냅다 아래위로 끄덕이고 만다.
여하튼 과일의 당분이 자극이 되었는지 실제로 불고기 몇 점이 텅 빈 위장을 채워서 배부름 이벤트가 발생하고 그것을 우리 몸의 커널(Kernel)이 간파하여 시상하부로 연결해 주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일 몇개와 불고기가 원인이 되어 우리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줄곧 느꼈던 허기도 잊고 부석사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맑고 따뜻한 가을 날씨 속에 모든 산과 들은 아름다운 단풍으로 짙게 물들어 있다.
주렁저렁 매달린 빨간 사과나무가 창가를 스치며 일행을 반갑게 맞았고, 은행나무 가로수는 마치 사열이라도 하는 우리를 위하여 샛노란 옷을 입고 좌우에 도열하고 섰는 듯 하여 마음이 우쭐 하였다.
붉게 타고 있는 산등
받침대의 뜻을 어기고 늘어진 사과
마음대로 따서 4KG에 만원
들어서자 인공폭포도 내리고
노란 은행잎에 마음이 젖어 발걸음도 가볍게 걷는 모습
아무리 단풍이 고와도 엄선생님의 치마색 보다 더 곱겠습니까?
태백산 부석사 정문 통과
먼저 찾은 곳은 부석사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균형과 절제가 있다는 절찬을 듣고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그 앞 석등(국보 제17호), 조사당(국보 제19호) 등 국보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명찰이다.
눈여겨 보아야 할곳은 무량수전 지붕의 추녀곡선, 그 추녀와 기둥의 조화, 간결하고 절제된 주심포의 절묘함, 배흘림 기둥, 소백산맥의 시야각 풍경.
은행나무의 단풍과 어우러진 정문
하늘과 땅이 모두 노~란 색이다
수녀님이 화엄종찰을 찾으시고.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수줍어 소나무 숲 속으로 숨어 있는 단풍나무와 당당히 나와 있는 은행나무의 색갈 비교
幢干支柱: 당을 매달던 깃대 (보물제255호),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지주(높이4.28m)
경북유형문화재 제130호: 통일신라 후기 3층 석탑(동탑). 높이3.6m.
서탑: 높이3.77m
梵鐘閣
봉황산 부석사를 오르는 데도 햇볕효과가 적용되었나.
해설자와의 대화
매력이 넘치는 목어법고 2층구조 누각
목어법고 누각 오르기 오른쪽 편 조화롭게 잇댄 사찰 부속 건물 들
멋진 기와지붕의 목어 법고 누각 오르기 왼쪽편 사찰 부속 건물
梵 鐘 閣
무량수전앞의 安養樓와 아름다운 경내, 가파른 돌계단으로 오른다.
사찰 부속 건물과 삼성각 건물
木魚와 法鼓 이층구조 樓閣
아름답고 美的인 多包階 팔작지붕구조의 무량수전 앞 安養樓
다포계 사이 사이로 부처님 좌상같은 공간이 보인다.
藏 經 閣
無 量 壽 殿 (國寶 제18호)
부석사의 本殿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
華嚴道場에 동향을 하고 앉은 서방극락세계의 主佛인 阿彌陀佛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의 하나로 돌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규모로 柱心包양식의 대표적 건물이고 고려 顯宗7년(1016) 圓融國師가 중창하였다.
公愍王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다시 지었다고 되어 있다.
안에는 서쪽에 불단을 두고 그 위에 丈六의 아미타불상 (塑造如來坐像)을 동쪽으로 향하여 안치하였다.
대웅전이 아닌 이유는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을 모시기 때문이라 한다.
柱心包: 기둥머리에 얹은 포
阿彌陀佛
石燈(國寶 제17호):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형 석등으로 가장 아름다운 9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안양루의 다포 사이 사이는 마치 부처님이 앉아 있는 듯한 공간이 보인다.
난간마냥 내어 지은 2층구조의 목어 법고 누각과 어우러진 부속 건물 들
기까이 멋진 기와 지붕과 멀리 소백산맥이 아스라이 한눈에 들어온다
三層石塔(寶物 제249호) 높이:5.26m.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탑. 탑돌이가 돌고 있다
善妙閣
善妙娘子
해동화엄의 초조 의상대사
의상대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47년(625) 3월 15일 신라 왕실 김씨 한신공과 선나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한신공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5대 손으로 대대로 문무대신을 지내온 귀족 명문가문이었으며 선나부인 역시 박혁거세 22대 손으로서 신라 8대 아달다왕의 14세손 대아손(6품관) 세덕공의 딸이었다.
속명은 일지(日芝)이며 15세에 황복사 안함대사를 은사로 출가를 해 황룡사 자장율사에게 계를 받았다.
안함대사가 열반에 들자 '효(曉)자든 사람을 벗을 삼고 지(智)자 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라' 는 생전 스승의 유언에 따라 삽량주(양산) 영취산 반고굴 원효를 찾아가 도반으로서 함께 불법을 공부했다.
원효대사는 진평왕 34년(617) 압량주(경산군)에서 태어나 의상대사 보다 8살 위였다.
원효는 6부족 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자손이었다.
나라에서 귀족대신들에게 6성(六姓 :최,이, 정, 설, 손, 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가운데 설씨 성을 가진 잉피공(仍皮公)의 손자로서 아버지는 담내말(談乃末)이었다.
의상과는 내외종 사촌으로 한신공 누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우가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18세되던 해 화랑낭도가 되어 전쟁 터에 출전해 공을 세워 대사위의 벼슬에 올랐으나 스스로 머리를 깍고 출가를 했다.
원효의 스승 낭지법사를 만나 화엄법문을 듣고 의상과 원효는 반고굴에서 5~6년 피나는 정진을 하다 전주 고달산 비래방장 보덕화상에게 열반경을 공부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로 온 의상과 원효는 국통 자장율사를 만나게 되었다.
자장율사로부터 중국불교와 문화를 전해 듣고 감동을 받은 의상과 원효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을 결심하게 된다.
의상과 원효는 당나라로 가기 위해 서라벌을 떠나 당주(당진) 바닷가에서 배를 기다렸다.
날이 어두어지고 비바람이 몰아쳐 둘은 비를 피하기 위해 한 고분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편안하게 지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 일어나 보니 바로 옆에 뼈다귀와 해골바가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귀신과 함께 잤구나 하는 생각에 온몸이 떨리고 두려운 가운데 원효는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흔들었다.
"한 생각이 나면 온갖 법이 생기고 한 생각이 없어지면 온갖 법이 다 없어진다 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삼계가 오직 한 마음에 달렸으니 다른 법이 없도다."
입당구법의 명분이 없어진 원효는 의상과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의상은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등주에 도착한 의상은 유지인이라는 주(州) 장군을 만나 관아에 머물며 극진한 공양을 받았다.
유장군에게는 뛰어난 미모를 갖춘 선묘라는 딸이 있었다.
신라라는 타국에서 온 용모가 준수한 의상을 보자 마자 한 눈에 반해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우러났다.
선묘낭자는 의상을 갖은 방법으로 유혹했으나 의상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송고승전에는 하는수 없이 선묘낭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세세생생 스님께 귀의하여 대승법을 성치코자 하오니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반드시 단월(신도)이 되어 스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시주해 드리겠습니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장군 집에 머물며 선묘낭자의 극진한 시봉을 받고 있던 의상은 종남산 지엄화상을 찾아갔다.
지엄화상은 당시 화엄의 새로운 학풍을 일으켜 문하에 법장(法藏 =賢首)과 같은 뛰어난 제자를 두고 있었다.
의상이 문하에 들어오자 지엄화상은 의상을 특별히 대우했고 의상 또한 입적(홍장 1년 (668 )10월 29일) 할때까지 스승을 하늘처럼 받들며 화엄학을 공부해 지엄화상으로부터 '화엄일승법계도'를 인가받았다.
지엄화상에게 장차 화엄학을 이을 상수 제자가 둘 있었으니 하나는 의상으로서 해동화엄이요, 하나는 법장으로서 중국화엄이었다.
어느 날 밤, 의상대사가 법계관문을 하고 있었다.
첩자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지금 당나라에서 신라를 치려 하니 어서 신라로 돌아가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의상은 입당구법의 목적이 완수되었기 때문에 신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법장스님의 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종남산을 떠나 등주로 온 의상대사는 입국 초부터 신세를 많이 졌던 유장군의 집에 들렸다.
유장군과 마주 앉아 그동안 종남산에서 수행하던 일을 이야기 하고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오던 의상은 선묘낭자를 찾았다.
스님이 종남산으로 들어간 뒤부터 스님을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 유장군의 말을 들은 의상은 마음이 애처로왔지만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의상대사가 배에 올라 막 포구를 떠나자 선묘 낭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자신을 한 번 보고 가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세찬 바람을 탄 배는 쏜살같이 포구에서 멀어져 갔다.
선묘낭자는 그동안 의상을 위해 지은 가사와 장삼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포구에 선채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슬피 울던 선묘낭자는 "나는 이미 스님께 바친 몸, 이 생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저 생에서 가서라도 따라다니며 스님의 하시는 일을 도와 법의 꽃이 활짝 피도록 노력하겠다' 며 울부짖고는 집을 향해 세 번 절을 하고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선묘낭자의 사랑이 승화된 부석사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귀국한 의상대사는 국내외 사정으로 인해 서라벌에 파묻혀 살았다.
그 이듬 해, 봄이 되자 당나라에서 화해를 요청해 와 두 나라는 다행이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명랑법사와 의상대사에게 왕사 국사 자리를 내리고 정치적 또는 정신적 지주로서 지극히 존경했다.
의상대사는 그동안 천축산에 불영사를 지어 스스로 자신의 수행처로 삼고 지역 주민들을 교화하는데 주력해왔으나 이제는 국가의 동량이 될 정신적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국교 대찰을 지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상대사는 문무대왕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종관 몇 사람과 같이 내이골(지금의 영주)을 지나 기목전 (풍기)에 이르렀다.
갑자기 거벌산(순흥) 일대에 오색 구름이 찬란하게 피어 올랐다.
오색구름따라 천전히 산밑으로 걸어나가자 작은 봉우리들이 연꽃처럼 피어나고 봉황이 날개짓을 하고 있는 큰 산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하늘에서 커다란 바위가 둥둥 떠다니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산 속 움집에 살던 무리들이 모두 뛰쳐나오며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백여명의 무리들이 움막집에서 도망쳐 나오자 바위는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내려 앉았다.
움막에서 뛰쳐나온 무리들은 순흥고을의 도둑들이었다.
의상대사는 도둑 무리를 향해 내가 이곳에 큰 절을 짓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돌벼락으로 죽는 줄만 알았던 도둑들은 스님 덕분에 일거리가 생기자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해 석달 만에 법당과 전각이 완성되어 대가람을 이루었다.
도둑놈 소굴이 의상대사 도력으로 불법도량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자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이 몰려와 출가하기를 회망했다.
의상대사는 오백여명의 일꾼들과 2천여명의 청년들을 출가시키고 화엄경을 설하니 이것이 바로 한국 화엄종의 대본찰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큰 산은 봉황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하여 봉황산이라 이름하고 뜬 바위가 내려 앉아 터를 잡았으므로 부석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대찰을 짓고 대중을 들이다 보니 대중이 마실 물이 걱정이었다.
걱정을 하던 의상대사 꿈에 선묘낭자가 나타나 "스님 걱정하지 마세요. 법당 마루 밑에 내 몸체가 숨어 있으니 나의 가슴을 치면 감로수가 나와 3천 대중은 충분하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이튿날 법당 마루를 뜯고 내려가 보니 용비늘이 선명한 큰 바위가 깔려 있었다.
용바위 가슴에 부풀어 오른 곳이 있어 의상대사가 지팡이로 툭 치자 샘물이 콸콸 솟구쳐 올라왔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 살아서 친히 모시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스님의 뱃속까지 시원하게 해드리기 위해 여기 감로수를 제공했으니 맛있게 드시옵소서."
의상대사는 '이는 필시 선묘낭자의 원력이요, 사랑의 징표로다' 라고 감복해 하며 그 위에 사당을 지어 선묘 낭자의 영정을 모시게 하고 3천 제자를 길러 선묘낭자의 은혜에 보답했다 는 설화가 전해온다..
安養樓의 多包階
멋진 경내 건물과 지붕
열심히 설명하는 해설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행. 옆의 스님이 나중에 도록을 보여주며 보충 설명을 하였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과주심포 부분
무량수전 서편의 浮石: 선묘낭자와 연결되어 전래
한눈에 들어오는 소백산맥의 전망,아스라이 멀리있는 산 능선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음
왼쪽부터 심명종님, 다혜 홍연자님, 상고 엄영순 선생님, 이옥남님, 총무 권순열님, 최형백회장님 , 정강홍님, 유기혁님, 조찬호님, 안강선님,조성국님. 요석(樂石) 김상필 편집자. (유제국님, 이석찬님, 또한분은 빠졌음)
엄선생과 함께한 편집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총무 권순열 여사
엄영순 선생님의 예쁜 모습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산에 언덕에... < 신동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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