妙寂途中(묘적도중)/이의현(李宜顯)
曲折千溪轉(곡절천계전)
幽深一鳥鳴(유심일조명)
時逢峒客話(시봉동객화)
如入武陵行(여입무릉행)
偶爾得佳處(우이득가처)
洗然無俗情(세연무속정)
巖阿愁寂寞(암아수적막)
萬古碧崢嶸(만고벽쟁영)
온 계곡 개울이 굽이쳐 돌고
깊고 그윽한 곳 새 한마리가 우네
때로 도인을 만나 대화 나누니
무릉도원에 들어가는 것 같도다
우연히 아름다운 곳을 만나보니
씻은 듯 말끔이 속된 생각 사라지네
바위 언덕은 수심에 잠긴 듯 적막하고
만고에 푸른 산벽은 우뚝 솟았도다
도곡 (陶谷) 李宜顯(이의현 1669~1745):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냄.
아버지 이세백(李世白 1635~1703)은 서인계의 중요 인물로 좌의정에 올랐고, 어머니 영일정씨의 할아버지, 즉 그의 외증조 정유성은 우의정을 지냈는데 정몽주의 후손으로 자부하면서 청빈을 가훈으로 삼은 인물이다.
이의현이 21세 되던 1689년(숙종15년) 기사환국으로 서인(노론)이 남인(소론)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자 이의현은 아버지를 따라 낙향하여 열심히 학문을 수학하였다. 26세 때 과거에 급제, 숙종조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던 그는 경종이 즉위하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형조판서에 올랐고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하지만 예조판서로 재임 중 신임사화로 소론의 고변에 의해 노론 강경파들이 죽임을 당하자 이의현 역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평양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곧 경종이 승하하고 노론이 지지하던 연잉군(영조)이 보위에 오르자 이의현도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조정의 요직에 나갔으며 57세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어진 선비들을 조정에 출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후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59세에 우의정에 올랐으나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이듬해 소론계가 난을 일으켜 노론의 일당 지배체제가 강화되자, 그는 노론에 속하였지만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는 평을 받아 그의 인품을 아는 영조는 판중추부사로 다시 기용하여 67세에는 국정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사후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는 신임사화나 정미환국 등 당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과격하거나 반대 당파를 완전히 배척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의연히 대처하여 소론에 대한 복수 보다는 노론의 주장을 따르면서도 의리를 먼저 주장하여 선비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으며 부를 축적하지 않고 청렴하게 사는 것을 실천하여 청백리로도 이름이 났던 인물이다. 또한 이의현은 뛰어난 학문과 문장을 지녔던 인물로 그의 저서 도곡집(陶谷集)이 전하고 있으며 각 지방 곳곳에 그가 지은 비문과 글씨가 남아 있다.
오늘날 정부 요직의 인물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권력형 부패로 이 나라가 황폐해지고 있는 현실을 보고 과거의 역사와 비교해 보면 당파 당쟁은 판박이요, 부정비리가 요동치는 모습이 어쩌면 한 치도 다름이 없이 닮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러고서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세계만방에 얼굴을 내밀고 어떤 민족이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부끄럽기 한이 없다. 못된 민족성이 민낯으로 드러나는 나라망신이 아닌지. 나랏일을 맡길 분을 우리손으로 뽑으면서 인물이 아닌 당만 보고 찍거나 사심에 의하다 보니 당쟁이 일어나고 부정부패로 뒷 거래가 판을 친다. 어진 대통령과 선량한 일꾼을 뽑아 일을 맡기지 못한 우리국민 각자에게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왕의 인재 기용만큼이나 선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바이다.
도곡 이의현 같은 인물이 없는지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