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은율(殷栗)고을의 황산이라는 곳에 김참봉이라는 유식한 자가 있었다.
얼마나 유식을 자랑하는지 한문 문자속으로는 이 김참봉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쳇, 그까짓 언문 나부랭이를 글이라고 쓰나?」
「흥, 암클 가지고 내 앞에서 행세하지 마라. 나는 진서(眞書) 선비니라.」
한글은 암클이요 언문이요 상놈글이고 한문은 진서 곧 참글이라고 하여 한글을 천시하였다.
이 김참봉은 평소에도 한문으로 썼으니, 식사 하셨습니까하면, 아식조반야(我食朝飯也)라고
하고 빨리가자고 하면,「속거속거(速去速去)라 했다.
하루는 난데없이 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서 자기 장인을 물고 달아나 버렸다. 방 안에서
김참봉은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아심경, 아심경(我甚警)이로다! 부락에 내려가서
얼른 동네 사람에게 알려서 저 호랑이를 혼내고 우리 장인을 살려야 겠다! 그래서 김참봉은
부락으로 뛰어들어서 젖먹던 힘을 다해서 크게 소리쳤다.
「원산지호가 지근산래하야 오지장인을 착거라 착거라!」
동네 사람은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늘그막에 마누라가 애기를 나으니 산
간하러 오라는 것인지, 자기집에 불이 났으니 꺼 달라는 것인지, 도둑이 들었으니 얼른 와서
물리쳐 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참봉은 동네 사람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안타가운 나머지 더 소리를 질렀다.
「지봉자는 지봉이래하고 지창자는 지창이래하여 속거속거 오지장인 구출하라.」
이것 또한 알아들을 동네 사람이 없었다. 맨끝에 구출하라는 알겠는데 어떻게 누구를 구출하라
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장인은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이런 무정하고 괘씸한 동네 사람들을 원님에게 일러 혼내주리라」
원님은 화가 나서 동네 사람을 불러드렸다. 왜 저사람의 장인이 죽게 되었는데도 가만히 있었
느냐? 사람의 도리가 무었이냐?
동네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랬다는 것이다.
김참봉에게 무엇이라고 소리쳤느냐고 복습, 복창을 하라니까,
「遠山之虎(원산지호, 먼산의 호랑이가) 自近山來(자근산래, 가까운 산에 내려와서) 吾之丈人
(오지장인, 우리 장인을) 捉去(착거, 잡아갔다), 持棒者(지봉자, 몽둥이를 가진자 ) 持棒而來
(지봉이래, 몽둥이를 가지고 오고), 持槍者(지창자, 창을 가지고 있는자는 ) 持槍而來(지창이래,
창을 가지고서), 速去速去(속거속거, 빨리빨리 가서, 救出(구출,구출해 달라).」
원님은 격노 하였다.
「이놈 김참봉아, 그냥 '호랑이가 우리 장인 물어가요! 어서 와서 구해줘요!' 그러면 될 것인데,
무슨 문자속이냐? 저 동네 사람들이 못 알아 듣는 것이 당연하지,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 원님까지도 그리 무식합니까?」
「이놈! 문자를 쓸 때가 따로 있지, 그 경황에 문자여? 나까지 바보 만들어? 김참봉을 형틀에
매고 볼기를 쳐라! 다시는 그 따위 문자를 쓰지 말렸다!」
「예, 아야 둔야! 통아!, 차후 불용문자호아!」
「이놈 쉽게 말하라! 무슨 말이냐?」
「我也臀也(아야둔야, 아 내 궁둥이야) 痛也(통야, 아파라!), 此後不用文字乎(차후불용문자호,
이후로는 문자를 안 쓰겠노라!)」
기어이 한자 속으로 말하는 김참봉, 매만 맞고 말았다.